젊음의 탕진
산문 (17)
며칠 전 책을 읽다가 '탕진'이란 단어에 붙들렸습니다. 책 내용은 뮤지션인 주인공이 음악에 돈을 다 탕진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튜브 뮤직에 만 원씩 쓰는 것이 다인 저랑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근데 왜 붙들렸을까, 곱씹다가 깨달았습니다. 올해 들어 갑자기,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젊음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요. '탕진'이란 단어가 그 느낌에 꼭 맞았던 것입니다.
36.5세의 초조함

작년, 계단뿌셔클럽에서 같이 활동하는 대학생 친구 A와의 대화였습니다. 함께 활동한 한 시즌을 회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주 훈훈했습니다.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 대한 감사와 칭찬으로 마무리를 하는 대목이었는데요. A가 제게 진심을 담아 말했습니다. "저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별로 기대가 없는 편인데, 대호님 같은 좋은 기성세대를 알게 되어 좋았어요."
이때만 해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무슨 소리야! 난 젊은이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만 36세가 된 올해부터는 젊음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생각이 정말 듭니다. 에너지 넘치는 해사한 얼굴의 친구들을 보면서 '저 젊음이 부럽다!'는 남사스러운 생각도 올해 처음 해본 것 같아요. 초조합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뭔가를 곱씹으며 후회하는 제가 생소했습니다. 저는 사실 후회라는 종류의 생각 자체를 잘 안 하면서 살았습니다. 과거에 관심이 적은 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젊음이 별로 남지 않았고, 귀중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나간 젊음을 잘 쓴 것인지, 허투루 탕진하지 않았는지 맥고나걸 교수님처럼 깐깐하게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젊음은 반드시 탕진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젊음을 탕진했습니다. 그리고 '젊음의 탕진'은 필연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젊음의 온전한 가치를 그 당시에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얄밉게도 완벽히 알맞게 쓸 수 없고, 그것이 빠져나간 뒤에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 젊음의 속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음은 탕진의 시간입니다.
젊음이 넘칠 때, 사람들은 물정 모르는 관광객처럼 젊음을 씁니다. 내가 가진 외화의 가치, 낯선 곳의 물가를 잘 몰라서 바가지 쓰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돈 쓰는 관광객처럼 행동합니다. 커리어상 도움 되는 일을 하지 않고 노는 데 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시간을 더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지 깐깐하게 따져보지 않고도 잘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탕진했는지 생각해보니 두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때만 할 수 있었던 선택' 대신 '나중에도 할 수 있는 걸' 선택하는 탕진입니다. 많은 체력, 정신력, 무모함이 필요한 선택이 전자에 해당합니다. 대표적으로 창업, 유학, 전직 같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더 집중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머리가 더 잘 돌아가던 대학교 때, 공부를 우습게 보고 성실하게 하지 않은 걸 후회합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도 그 가치를 다 알진 못할 테니, 또 탕진할 것입니다!
남은 젊음은 어떻게 탕진할 것인가?

처음 이 고민을 시작할 때 저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남은 젊음을 탕진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바꾸게 됩니다. 어차피 젊음의 완벽한 활용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탕진해야 잘 탕진하는 것인가?'를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단, 스크루지 영감 같은 생각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이의 시절이 얼마 안 남았다는 초조한 생각이 드니까 사람이 시간에 인색해집니다. 결혼식,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 모임, 주변 사람을 살피는 시간 같은 걸 재고합니다. 이렇게 괜히 만만한 데서 인색하게 굴 게 아니라, 큰 결정이나 잘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관계와 인연은 소중한 만큼 아낌없이 쏟고, 일상의 사소한 선택이 아니라 인생의 큰 결정을 할 때 신중하게 하면 충분합니다.
또, 젊음의 시간 총량을 줄이는 선택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젊음의 요소는 건강, 사고력, 호기심, 외모 등 다양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핵심을 다르게 봅니다. 저에겐 '호기심'이 중요합니다. 타인에게, 세상에게 궁금한 것이 없어질 때, 뭔가가 멈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호기심을 오래 유지하면 '젊은이의 시간'이 늘어나고, 반대로 호기심을 잃으면 시간이 줄어듭니다. 젊음의 시간 총량이 줄어들면, 그 자체로 탕진의 정도가 커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선 운동을, 동안을 위해서는 선크림 성실히 바르고 피부과 다니면 됩니다. 근데, 호기심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답은 모르겠지만,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자주 만나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혹시 좋은 방법 아시는 분 계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일요일을 이 편지를 쓰느라 즐겁게 탕진한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