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공불락 무대의 함락
우정원정대 (2)
이번에 우정원정대로 다녀온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이하 ‘부락’)은 유료 관객만 4만 명이 넘는 엄청 큰 음악 페스티벌입니다. 여의도 1.5배 크기의 광활한 땅에 무대가 5개 서는데, 가장 큰 무대가 ‘삼락 스테이지’, 두 번째 무대가 ‘그린 스테이지’(이하 ‘그린’)입니다. 오늘 주인공은 ‘그린’입니다. 재밌는 공연 대부분이 열리는 이 무대를 휠체어로는 사실상 갈 수 없었거든요. 난공불락이었습니다. 우정원정대가 가기 전까지는 말이죠.
갈 수 없는 땅, 그린 스테이지

‘그린’ 주변은 참 아름답습니다. 실개천이 흐르고, 잘 보존된 늪지대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왜 이름이 그린 스테이지인지 납득이 갑니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부락 운영팀은 하천과 늪지대 위로 철제 임시 다리를 두 개 설치했습니다. 문제는 이 다리에 오르고 내리려면 계단을 밟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관객들에게는 보고 싶은 공연이 있어도 갈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부락에 다녀온 친구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린’은 아마 못 갈 테니 좀 알아보는 게 좋을 거라고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중요하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우정원정대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거기까지 고민이 닿지도 못했거든요. ‘아쉽지만 5개의 무대 중에 하나 정도 못 보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고 고민을 더 안 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건 사전 답사 때였습니다. 가서 보니 ‘그린’이 세워질 공간이 너무나도 광활한 것이 아니겠어요? 뒤늦게 작년 ‘그린’에 섰던 아티스트 라인업을 찾아봤습니다. CNBLUE, 넬, MIKA, 이승윤 등, ‘아뿔싸, 여기는 서브 무대가 아니라 사실상 메인 무대구나. ‘그린’ 무대들을 못 보는 부락에 가는 건 참치김밥을 안 파는 김밥집에 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리는 카드면 어떡하지?

우정원정대는 페스티벌 운영팀의 협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프로젝트입니다. 감사하게도 부락 운영팀에서 함께해 주셔서 이번 우정원정대 2도 가능했습니다. 긴밀하게 서로 의논하면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린’을 휠체어로도 갈 수 있도록 하는 일도 부락 운영팀에 상의, 제안해 볼 수는 있었는데요. 문제는 협의할 사안이 ‘그린’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말이 ‘협의’지 사실 부락 운영팀에서 우리의 제안을 들어주셔야 하는 안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 관객 편의를 위한 것을 하나라도 더 하고 싶고, 부락은 한정된 자원 내에서 무얼 할지, 말지 판단하는 입장이니까요. 그럴 때는 쫀쫀한 전략을 짜야 합니다. 안건의 우선순위를 정교하게 배열하고, 그중에 무엇을 포기할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전략을 짜면서 저의 고민은 ‘그린’ 문제가 정말 중요한데 ‘어차피 안 되는 카드가 아닌가? 차라리 다른 될 만한 걸 요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제안은 ‘계단 달린 다리가 아니라 경사로 달린 다리를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당장 페스티벌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고, 서류 고치는 것도 아니고 시설 설계를 바꾸기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어떤 카드는 살고, 어떤 카드는 죽습니다. 몇 번 남지 않은 턴, ‘그린’ 카드를 내는 것이 정의롭지만 실리를 잃는 무책임한 결정이 되지는 않을까? 참 입맛 떨어지는 고민입니다.
안 풀릴 때는 하소연

고민이 깊을 때 주변 동료,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물어봤습니다.
- 의견 1: “장애인 관객이 돈 내고 표를 샀는데 아예 갈 수 없는 스테이지가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해.”
- 의견 2: “어쩌면 우정원정대 부스 잘 하는 것보다 부락에 더이상 누군가 못 가는 스테이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중요한 거 아닐까?”
- 의견 3: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무대가 그린일 것 같은데 나 못 가면 진짜 드러눕울 거야. 개통 못 하면 내 휠체어 들고, 업고라도 갈 각오해.”
- 의견 4:“작년에 보니까 비장애인들도 계단에 많이 걸리던데 경사로가 모두에게 낫다고 설득해보면 어떨까?”
대부분 하소연으로 흐르긴 했지만, 큰 도움이 됐습니다. 대화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을 이유와 설득 논리를 얻었거든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냐고요? 비밀입니다. 그냥, 전보다 좀 더 뻔뻔하고 비굴해질 수 있었다고만 해두겠습니다. 마음을 다르게 먹고 나니, 쥐고 있는 카드가 더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결과 난공불락의 무대, 그린 스테이지가 열렸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그려서 보낸 경사로 다리 상상도가 영 못미더우셨나 봅니다. 부락 운영팀은 아예 늪과 하천을 흙으로 메워 평지로 만들었습니다. 아래는 이동약자와 그 친구들이 도도하게 그린 스테이지로 들어서는 모습입니다. 뭉클했어요.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갈 수 없는 무대는 국내 최대 음악 페스티벌 부락에 더 이상 없습니다.
부산축제조직위원회 사랑합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라고요.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