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능 민주주의 VS 저성능 민주주의
고성능 민주주의 (2)

1편에서 ‘한국이 소멸로 가게 된 원인은 제때 제도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제도 변경 지연이 만연한 상황을 저성능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소멸을 피할 수 있는 ‘고성능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설명할 차례입니다. 덜 따분한 설명을 위해 사례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청년 세대를 위한 아파트를 지으려다 실패한 서현동 110번지 사건입니다.
저성능 민주주의의 교과서적 사례

저희 동네에 코엑스 전체 부지만 한 빈 땅이 있습니다. 이 땅 이름은 ‘서현동 110번지’입니다. 2019년 정부는 이곳에 2,500세대 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목표는 ‘청년 주거 문제 해결’입니다. 수도권에 살고 싶은 젊은이는 많고, 집은 부족하니 집이 비쌉니다. 빈 땅에 아파트를 지어 청년 세대가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더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소멸의 원인은 저출생, 저출생의 주요 원인은 ‘높은 주거비’입니다. 그러니 이 계획은 소멸의 원인을 잘 겨냥했습니다.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계획 같지만, 큰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동네 주민들이 교통 혼잡, 학급 과밀, 환경 훼손 등을 이유로 사업을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시위에 나섰고,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갈등이 커지자 이 계획을 추진했던 당시 여당의 정치인들도 입장을 바꿨습니다. 사업이 한동안 중단됐고, 최근에야 내용을 수정해 다시 추진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성능 측정 3개 지표

어떤 사회의 민주주의가 고성능인지, 저성능인지 측정하는 지표를 저는 세 개로 제시합니다. (1) 중요 의제 집중도 (2) 합의점 다양성 (3) 결정 적시성입니다. 위 사례를 활용해 설명하겠습니다.
(1) 중요 의제 집중도: ‘어디 훌륭한 멕시코 음식점 없나?’는 저의 큰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현동 110번지에 공공주택이 공급되는 문제에 비해서는 공동체의 생존에 있어 중요하진 않습니다. 중요 의제 집중도란 ‘어떤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뜻합니다. 가령, 110번지 사건에서 무주택 청년들은 참여하지 않고, 지역 주민 일부만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공동체의 미래에 중요한 의제에 다수 시민이 무관심하거나 소외되어 있을 때, ‘중요 의제 집중도’는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합의점 다양성: 공동체가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선택할 수 있는 합의안의 수나 폭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갈등 상황에서 양측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이 전혀 없는 경우(0), 단 하나의 대안만 가능한 경우(1), 여러 개의 수용 가능한 대안이 존재하는 경우(n)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중 마지막 상태를 '합의점 다양성이 높다'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서현동 사건은 법정으로 가면서 정부와 반대 주민 간 합의점 '0'의 상태가 됐습니다.
(3) 결정 적시성: 작년 연말 정부는 서현 공공주택지구 계획 수정안을 발표하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반대 주민 의견을 수용해 2,500세대에서 883세대로 줄였습니다. 공원을 늘리고, 교통 대책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규모가 줄어 아쉽지만, 바람직한 결정입니다. 반대 운동도 없어 잘 추진될 것 같습니다. 문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합계출산율은 0.92명(2019)에서 0.75명(2024)으로 감소했습니다.
세 개 지표가 모두 높은 수준이면 ‘소멸’을 피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생존에 중요한 사안에 국민들이 관심이 많고, 유연하게 이해관계가 조정되어 생산적인 논의와 좋은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이것이 ‘고성능 민주주의’ 상태입니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데, 문제는 ‘어떻게’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까요?
보충설명: 합의점 다양성에 대하여

그건 다음 편에 설명합니다. 그전에 잠깐, 3개 성능 지표 중 ‘합의점 다양성’에 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고성능 민주주의 구현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려면 미리 설명을 좀 해야하거든요.
집단 A, B가 있습니다. 한 사안에 대해 서로 이해관계가 다릅니다. 그래도 어떤 합의점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이때 상황은 그림처럼 세 가지입니다. 1) 합의점이 0개인 상황 2) 1개인 상황 3) n개(n>1)인 상황입니다. 공동체의 생존에 가장 유리한 상황은 3)입니다. 합의점이 다양하다는 건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다는 뜻이고, 선택의 폭이 넓으면 ‘더 좋은 선택’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예를 들어 서현지구에 주택을 공급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3)의 상황이었다면, 더 창의적이고 문제해결력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채택도 가능합니다. 주택 공급량을 2,500세대보다 더 늘리되, 100% 공유 차량만 쓸 수 있는 단지를 만들어 주차 문제를 해결한다든지, 인구가 부족해 유치하기 어려웠던(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갈망했던) 지하철 노선을 유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회를 1) 또는 2) 또는 3)으로 만드는 핵심 변수를 저는 경제성장률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도 고정되었다고 본다면,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경험의 양’이 1), 2), 3)을 가른다고 생각합니다. 1)의 상황이었더라도 이견을 경청하면 조금 공감하게 되고, 공감하면 양보할 여지가 생깁니다. 양보하는 만큼 교집합이 커지고, 선택 가능한 합의점이 다양해집니다.
중요한 문제에 다들 관심을 갖고, 이견을 경청하며 토론해 합의점을 다양하게 만들고, 제때 결정을 내리는 상태를 ‘고성능 민주주의’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3편에서는 가장 중요한 ‘그래서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봄시즌을 막 마무리해 너무 아쉽고 둠칫둠칫 신이 나는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