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가주세요
이토록 아름다운 정치 (3)
지방의원으로 일하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일했던 그는 “정치는 허업(실속 없이 겉만 꾸며놓은 사업)이다”라는 말을 자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2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정치로 누구의 삶이 나아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의 회의감에 공감했습니다. 뉴스 보면 그런 생각 드니까요. 그러나 며칠 뒤 저는 한 장례식장에서 생각을 고쳐먹게 됩니다.
20대 여성 부사관의 죽음
고 이예람 중사는 공군 20전투비행단 소속의 군인이었습니다. 졸업하면 공군 부사관이 되는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직후 2017년에 임관해 레이더체계정비 특기를 갖고 일하던 부사관이었습니다. 2020년 상관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었고, 신고했습니다. 이후 조직적인 회유, 무마 압박을 받았습니다. 2021년 5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 이예람 중사 사망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군이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사망했지만 공군 검찰은 가해자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되자 공군의 상위 조직인 국방부가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은폐, 무마에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특검’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특검’은 검사, 군검사가 아닌 사람을 ‘특별히 검사로 임명해서 수사하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은 공군 법무실장 등 군 내의 법무 관련 부서 군인들입니다. 수사를 맡은 군검찰, 국방부 수사단과 친밀합니다. 이렇게 수사의 주체와 대상이 같거나 가까울 때 ‘특검’을 활용합니다. 제3의 독립된 인물이 수사를 해야 공정한 수사가 이뤄질 수 있으니까요.
특검의 어려움
특검의 문제는 특검법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특검하려면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국회는 늘 결정이 잘 안됩니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민의힘, 정의당, 국민의당, 기본소득당이 공동으로 특검법을 냈지만, 집권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202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이 뒤늦게 특검을 함께 하자는 입장을 냅니다.
어렵게 2022년 4월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가 이뤄집니다. 근데 이게 하루 만에 또 깨집니다. 특별검사를 임명하는 방식에 관해서 입장 차이가 있었습니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특별검사 후보를 ‘여야가 각각 추천하자’고 했고, 야당들은 ‘대한변호사협회 같은 제삼자가 추천하자’고 했습니다. 작은 차이 아니냐고요? 이 ‘작은 차이’ 때문에 영영 안 될 수도 있었습니다.
국회는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진 일을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두가 되었을 때 처리되지 않으면 영영 처리될 수 없는 법들이 있습니다. 여야 간 입장 차이는 작더라도, 이것 때문에 조금씩 미뤄지고 지연되면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국회는 새롭게 주목받는 사안을 다루게 되고, 잠깐 미뤄졌던 안건이 다시 올라오지 못해 영영 안 되는 일이 생깁니다.
박지현의 눈물
특검법 처리를 놓고 입장 차가 팽팽하던 당시 민주당의 공동비상대책위원장(당대표 격)이었던 박지현은 ‘여야합의’를 촉구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야합의가 한 번 됐는데, 무산된 데에 면목이 없다며 유가족에게 사과했습니다. 직후 여야는 다시 협상했고, 민주당이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야당의 주장을 수용한 특검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됐습니다.
특검은 수사, 기소되지 않았던 책임자들을 기소했고, 대부분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1심에서 실형을 받은 경우도 많고, 수사 개입 의혹이 있는 전익수 법무실장은 계급이 강등됐습니다. 공군과 국방부의 조사로는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 상당 부분 밝혀졌습니다. 유가족, 함께 한 NPO인 군인권센터 입장에서 100%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겠지만, 특검의 활동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저께 이예람 중사의 장례식이 3년 만에 치러졌습니다. 빈소가 집에서 가까워 다녀왔습니다. 빈소에는 군복을 입은 이예람 중사의 친구,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유가족과 친구들이 포옹하며 어려웠던 시기를 함께 마무리하고 계셨습니다. 그 풍경을 보며, 그때, 영향력 있는 자리에 또래의 억울한 죽음이 비통해 앞뒤 재지 않는 정치인 박지현이 있어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구한 날 일어나는 국회 파행이 대부분의 정치인에게는 울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너무나 ‘허업’ 같아 거들떠보기 싫을 때가 많지만, 때로는 그것이 아니면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는 것이 정치입니다. 이예람 중사님의 안식과 유가족, 동료, 친구분들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이대호 올림.